오늘날 세속 사회에는 용서에 대한 세 가지 접근법이 있다. 첫째, '값싼 은혜', 둘째, '인색한 은혜', 셋째, '은혜 없음'이다. 이 세 가지 모델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용서의 수평적 차원은 있는데 수직적 차원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성경의 모델은 수평적 차원과 수직적 차원이 공존한다. 창 33장은 야곱과 에서의 극적인 화해를 다룬다. 애초에 두 사람은 화해할 마음이 전혀 없다. 그러던 두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난다. 야곱은 진정으로 형 에서와 화해하길 원한다. 지난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친다. 에서의 용서를 간절히 구한다. 에서는 그런 야곱을 용서하고 동생으로 환영한다. 결국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진다. ‘화해의 본질은 용서’다.
오늘 본문을 관통하는 핵심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은혜'다. 야곱과 에서가 화해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 물론 하나님의 은혜다. 그런데 야곱이 강조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은혜는 은혜인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다. 8절에 의하면 피해자인 에서의 은혜다. 화해란 일방적 행동이 아니라 쌍방적 행동이다. 반드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시에 나서야 한다. 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쳐야 한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진심 가득한 사죄를 외면하면 곤란하다. 무엇보다 기독교의 용서에서 가장 중요한 차원이 있다. 바로 수직적 차원 곧 하나님과의 관계다. 타인을 용서하려면 우선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경험이 있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기독교의 세 가지 영적 자원을 알아야 한다. 첫째, 요셉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창 50:19)라고 말한다. 요셉은 충분히 겸손하기에 용서할 수 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다. 둘째,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 50:20)라고 말한다. 요셉은 충분한 기쁨이 있어 용서할 수 있다. 그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게 분명하다. 셋째, 요셉은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21)라고 간곡한 말로 형들을 위로한다. 요셉은 악을 선으로 갚는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요셉보다 훨씬 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기독교가 우리에게 주는 자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예수님의 큰 희생이다. 이 희생의 동기는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다. 그 은혜에는 어마어마한 희생이, 무한한 희생이 뒤따른다. 예수님이 나를 살리려 지옥의 심장부까지 경험하신다. 그 엄청난 죽음의 사랑이 나를 변화시킨다. 십자가 사랑이야말로 개인의 변화를 낳는 탁월한 열쇠다. 동시에 인간의 용서와 화해를 이루는 위대한 열쇠다. 화해의 본질은 용서란 사실을 꼭 기억해야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세 가지 영적 자원을 붙들어야한다. 그것은 겸손과 기쁨과 사랑이다. 그러니 요셉보다 더 겸손하게, 더 확신에 차서 용서를 통해 화해의 길로 나아가자. 끝으로 외쳐보자.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 사랑이 최고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 사랑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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