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는 성경에서 ‘예언서’(선지서)에 속한다. 성경의 ‘예언’은 ‘맡겨진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두 개의 비유로 이스라엘의 배반을 고발하신다. 첫 번째는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다(2절). 여호와를 배반한 이스라엘은 아버지를 거역한 아들과 똑같다. 두 번째는 주인과 주인이 키우는 짐승의 비유다(3절).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계속해서 4~9절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고발한다. 5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께 반항하다가 맞아 중상을 입게 된다. 그 상황에서도 반항을 멈추지 않아 6절을 보면 온몸에 성한 데라곤 한 곳도 없다. 안타깝게도 무지한 이스라엘은 치료를 거절한다. 다음으로 7절 이하에 병의 비유가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땅은 황폐하고 성읍은 불에 탄다. 8절에 따르면 시온만 겨우 살아남는다. 9절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적은 수지만 일부를 남겨주신다. 이제 10~17절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준다. 예루살렘의 지배계급과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법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제사 의식적 행사에만 열심을 낸다.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제물을 불에 살라 바친다.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그 수많은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12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제사와 예물로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무를 대체하려고 한 것이다. 13절에서 하나님은 착각에 빠진 그들에게 단호한 명령을 내리신다. 성회로 모이면서도 거리낌 없이 악을 행하는 그들의 제사는 하나님께 무익하다. 제사 의식과 절기의 축제에만 열심인 자들과의 단절을 단호히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제사와 절기뿐 아니라 기도마저도 거절하신다. 기도하는 자의 두 손이 이웃의 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심판보다 구원을 바라신다. 그래서 죄로 물든 그들에게 용서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다. 비록 이스라엘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결국 회복과 화해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용서에 따라 가능해진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19~20절). 지금 이스라엘 앞에 중대한 선택이 놓여 있다. 축복의 비결은 순종이요, 저주의 원인은 불순종이다. 이스라엘은 많은 제물로 자신들의 악행을 덮으려고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수많은 제물이 아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신다. 수많은 예배와 넘치는 헌금이 순종을 대체할 순 없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빠진 예배는 아무 의미가 없다. 특히 우리가 예배 만능주의를 조심해야 한다. 예배 만능주의가 무서운 이유는 무엇일까? 예배와 삶의 분리라는 왜곡된 신앙에 빠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예배 따로, 삶 따로’가 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셈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은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삶이 쏙 빠진 종교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기초가 되는 경건이다. 선행과 정의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순종의 삶이 경건한 예배로 연결된다. 하나님이 다시 기회를 주신 것이다. 회개하여 죄를 씻으라고 하신다. 다시 선행과 정의와 이웃 사랑의 삶으로 돌아오라고 하신다. 오늘 우리 역시 ‘하나님의 초대, 그 은혜의 부르심’ 앞에 서 있다. 완악하고 패역한 이스라엘과 별다를 것 없는 우리가 아닌가. 그런데도 하나님은 시퍼렇게 멍든 가슴으로, 피 맺힌 울음을 꾹꾹 누르고 계신다. 도저히 끊으실 수 없는 사랑이요, 포기하실 수 없는 사랑이다.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 그 은혜의 부르심으로 나를 초대하신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순종하자. 선행과 정의와 이웃 사랑의 삶을 들고 예배와 기도의 자리로 달려가자. 하나님이 내 예배를, 내 기도를 기쁘게 받으실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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