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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칼럼
아빠, 사랑을 탕진하시다(1)(눅 15:11-32절)
2025-09-28 01:16:41
디지탈사역실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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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세상을 도덕적인 착한 사람들과 부도덕한 나쁜 사람들로 구분하지 않으신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력 구원 사업에 몰두해 있다. 하나님과 사람들을 이용해 스스로 권력과 통제력을 거머쥐려 애쓴다. 방법만 다를 뿐인데, 두 아들 모두 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둘 다를 소중히 여긴다. 두 아들 모두를 풍성한 사랑의 잔치 속으로 불러들인다. 이것은 예수님의 복음이 전혀 다른 영성이란 뜻이다. 이 복음은 종교나 무종교, 도덕이나 부도덕, 도덕주의나 상대주의, 보수나 진보가 아니다. 그렇다고 양극단 사이의 중간 어디쯤도 아니다. 그것은 전혀 완전히 180도 다른 그 무엇이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무한대의 사랑이요 용서요 은혜이다.

  결론적으로 두 아들 모두 틀렸지만 모두 아버지께 사랑받는다. 그러나 이야기는 서로 다르게 끝난다. 예수님은 왜 줄거리를 이렇게 구성하신 것일까? 왜 하나는 구원받고 아버지와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지만 다른 하나는 실패할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자력 구원 사업은 둘 다 틀렸으나 똑같이 위험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이 비유의 아이러니 곧 역설이 하나 더 드러난다. 동생이 아버지를 피해 떠난 일은 너무도 명백하다. 마음만 떠난 게 아니라 몸도 아버지를 떠났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형은 여전히 집에 남아 있다. 안타깝게도 실상은 동생에 비해 아버지와 더 멀어지고 소원해진다. 눈이 멀어 자신의 실체를 영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형은 지독한 반항의 길을 걸어간다.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는 형이 눈멀어 실상을 보지 못하다니? 따라서 형 같은 바리새인들의 상태가 영적으로 더 절망적이다. 오늘도 종교적인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으니까. 게다가 교회 안에서 많은 일들을 감당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행여 누군가로부터 이런 쓴소리를 듣는다면 어떨까? 당신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네요.’ 아마 발끈하면서 이처럼 반응할지도 모른다. 나한테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나는 교회 문이 열려 있을 때마다 늘 언제나 교회에 있었는데.’ 과연 이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일찍이 이스라엘에서 이렇게 가르친 랍비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구원에 이르는 참된 진리이다.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복음이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이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누구인지 묻고 계신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기의 참모습을 볼 수 있길 바란다. 오늘 나는 누구인가? 집을 나가 아직도 방황하는 둘째 아들인가? 아니면 집에 있지만 아버지께 늘 반항하는 맏아들인가? 비록 잃어버린 아들이라 할지라도 소망은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부어주시는 무한대의 사랑과 용서와 은혜이다. 이 사랑과 이 용서와 이 은혜로 내가 새롭게 회복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아들로 살아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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