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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칼럼
아빠, 사랑을 탕진하시다(2)(눅 15:15~32)
2025-10-04 20:26:15
디지탈사역실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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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죄와 구원을 자주 잃음찾음의 비유로 말씀하신다. 19에선 자신의 사역을 구조 작전으로 요약하신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다. 본문의 비유에는 잃어버려진 두 아들이 등장한다. 한 명은 동생이고, 다른 한 명은 형이다. 오늘 이 시간엔 형의 잃어버려진 상태를 깊이 살펴보려고 한다. 현재 형은 잔뜩 화가 나 있다. 내뱉는 말마다 원망이 뚝뚝 떨어진다. 비유 속 형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선행에 보상이 따르기를 바란다. 보상이 없는 경우엔 혼란과 분노에 휩싸인다. 만약 선행과 반듯한 삶을 공로로 내세운다면 어떨까? 그걸로 하나님께 행복한 삶을 얻어 내려 하는 것이다. 역시 분노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삶이란 결코 자신의 바람대로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는 늘 마땅히 받아야 할 몫보다 덜 받는다고 느낄 것이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드러내시는 진리가 있다. 잃어버린 형의 상태도 동생의 상태 못지않게 굉장히 잘못되고 해롭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세상의 형들은 반드시 이 비유의 거울로 자신을 비춰봐야 한다. 예수님은 주로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들의 실체를 보여주시고 변화를 촉구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동생은 자신이 아버지와 멀어져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형은 자기도 그렇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따라서 형의 잃어버려진 상태는 대단히 위험하다. 형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상태를 치유해 달라고 구할 일이 없다. 자신의 상태에서 아무런 문제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종교에 등을 돌린 사람들은 기독교도 하등 다를 바 없다고 믿는다. 그들은 형들이 넘쳐나는 교회에 가본다. 그런 후 기독교도 또 하나의 종교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라고, 그 말이 틀렸다고 말씀하신다. 분명 복음을 믿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비유 속 형과는 크게 다르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면서 형의 모습에 가까운 사람도 많다.

  과연 진정한 형은 누구일까?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고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 구원할 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형을 비유 속에 등장시키지 않으신다. 진정한 형을 상상하고 동경하도록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서이다. 우리에겐 그런 형이 계신다. 그분은 우리를 찾으러 옆 나라로 가는 정도가 아니다. 저 높은 하늘에서 이 낮은 땅까지 오셔야 한다. 치르셔야 할 대가란 한정된 금약 정도가 아니다. 자신의 목숨이라는 무한한 대가를 기꺼이 치르신다. 그렇게 하셔서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집안에 들이셔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진 죄의 빚이 그만큼 막대하기 때문이다. 이 비유의 핵심은 용서에는 항상 대가가, 희생이 따른다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진정한 형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우리의 빚을 갚아 주신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은혜로 값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

  우리의 진정한 형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경이롭게 바라보자. 그 십자가의 사랑을, 그 엄청난 희생의 용서를 풍성히 체험하자. 그럴 때 동생이나 형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늘 아버지의 온전한 자녀로서 행복한 삶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강력히 쏟아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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