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은 이 땅의 모든 교회를 위한 주님의 메시지이다. 모든 편지는 ‘내가 안다’는 말로 시작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교회의 실제 모습을 완벽히, 정확히 아신다. 그래서 각 교회의 형편을 제대로 평가하신다. 칭찬하시기도 하고 책망하시기도 한다. 오늘 예수님은 교회인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우리 사이를 거니시고 우리를 낱낱이 살피신다. 우리를 정확히 아신다. 우리가 주님 앞에선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주님이 모르시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우리 주님은 모든 걸 다 아신다. 우리의 허물이나 죄뿐만이 아니다. 칭찬받을 만한 아름다운 행위도 다 아신다.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행위라도 주님은 놓치시는 법이 없다. 다 기억하신다. 다른 사람이 내 좋은 행위를 몰라줘도 괜찮다. 주님이 알아주시면 그만이다.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이 크게 칭찬하실 만한 세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는 행위이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행위를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바로 뒤에 ‘수고’란 설명을 덧붙이신다.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을 부지런히 섬긴 활동적인 교회다. 둘째는 인내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다는 게 뭔지 잘 안다. 하지만 이런 핍박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다. 셋째는 신앙이다. 니골라당이라 불리던 자칭 사도들이 에베소 교회를 찾아온다. 그들은 아시아의 모든 교회에 자신들의 악한 교리를 퍼뜨린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속지 않는다. 그들에겐 영 분별의 은사가 있다. 그 어떤 악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데 4-5절에서 큰 반전이 일어난다.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렇게 칭찬받을 만한 아름다운 에베소 교회에도 문제가 있다. 이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하나도 없는 법이다. 예수님은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다. 책망의 내용은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처음 사랑’은 무엇일까? 주님에 대한 사랑이까? 아니면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일까? 둘 다를 가리킨다. 성경에서 항상 주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분명 과거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사랑은 진실한 것이었다. 그들 속에 주님을 향한 열정적인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으로 주님을 아름답게 섬겼다. 그 사랑으로 서로서로 헌신적인 섬김의 삶을 실천했다. 문제는 지금도 그 처음 사랑이 살아 있느냐 하는 것이다. 처음 사랑을 빼앗는 장애물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처한 견디기 힘든 열악한 상황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상황에 점점 매몰된다. 그러다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한 백성인 우리를 절대로 잊지 않으신다. 바로 여기에 회복의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버렸어도 말이다. 예수님은 5절에서 구체적인 해결책을 3단계로 제시하신다. 첫 번째 처방전은 어디서 떨어졌는지 기억하라는 것이다. 두 번째 처방전은 회개하라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처방전은 처음 행위를 행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처음 사랑이 아직도 손짓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이라도 나는 얼마든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속에 거하는 축복이 내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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